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(문단 편집) === [[1차대전]]기 === [[1914년]] 7월,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오스트리아 국경의 34카자크연대에 배치되며 현역에 복귀했다. 그는 [[제1차 세계 대전]] 동부전선의 시작이었던 [[동프로이센]] 침공작전에 종군했다. 동부전선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매우 용맹한, 하지만 지나치게 용맹해서 무모한 장교라는 평판을 얻었다.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, 기병대 돌격 같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를 할 때 희열을 느꼈다. 그래서 성 게오르기 4등장, 성 블라디미르 4등장, 성 안나 3-4등장, 성 스타니슬라프 3등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. 그러나 이렇게 공을 세우고도 개떡 같은 성질머리를 못 버려 [[1916년]] 만취한 채 다른 장교를 두들겨 패서 [[영창]] 2개월에 처해졌다. [[1917년]] 1월 석방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[[오스만 제국]]과의 전선인 [[캅카스]]로 이동했다. 그런데 [[2월 혁명]]이 일어나 [[로마노프 왕조]]가 몰락했다. 이것은 정신적 중세인이자 골수 [[왕권신수설|왕권신수론자]]인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게 종말론적 사건이었다. 그는 혁명을 러시아의 천명이 다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. 한편 캅카스에서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평생의 단짝 [[그리고리 세묘노프]]를 처음 만났다. 세묘노프는 부친으로부터 [[부랴트인]] 혈통을 물려받은 [[소수민족]] 출신으로, 이 때문에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처럼 장교들 사이에서 겉돌던 인물이었다. 당시 [[오스만 제국]]은 소수민족들을 [[인종청소]]해서 수천 명의 소수민족들이 러시아로 도망치고 있었는데,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는 상부에 이 난민들을 부대로 조직하겠다는 제안을 했다. 혁명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군에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었다.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지휘하에 [[아시리아인]] 부대는 소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체 전황에 보탬은 되지 못했다. 세묘노프는 아시리아인들로 했던 경험을 시베리아의 [[부랴트인]]을 대상으로 시도해 보자는 발상을 떠올렸고, [[알렉산드르 케렌스키]] 정부는 그 계획을 승인했다.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세묘노프는 부랴트인 연대를 모집하러 동쪽으로 떠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